목격자가 없는 살인 사건에서 피고인 B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다. 피해자의 혈흔이 묻어 있는 칼 하나가 유일한 증거였다. 그런데 그 칼은 경찰이 영장 없이 B의 집에 침입하여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사용할 수 없다는 법원칙에 따라 그 칼은 증거로 사용될 수 없었다. 담당판사인 A는 무죄를 선고하고 B를 풀어주었다. C판사가 A판사에게 자신의 조직에 가입하라고 하였다. 판사들로만 구성된 그 조직은, 재판이 끝난 살인 사건을 다시 가져와 표결을 거쳐 유죄로 결론이 날 경우 살인을 청부하는 모임이었다. B는 그 조직의 재심의를 거쳐 유죄로 판단되었다. 다행히도 A판사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고 영화 'The Star Chamber'의 줄거리이다.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그 재심의가 오심(誤審)이고 진범이 따로 있음을 보여준다.
재판은 대부분 과거사를 다룬다. 그 날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실을 규명하는 일이 일차적 과제이다. 그런데 과거 그 일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마치 인간의 귀가 개미의 발자국 소리나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대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는 심리가 있다. 게다가 법정에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본능까지 작동된다. 판사가 법을 알지는 몰라도 사실관계를 당사자만큼 알 수는 없다. 재판은 그런 판사를 증거를 통하여 설득하는 과정이며 그 설득은 증거로 확인된 사실만을 기초로 한다. 특히 형사재판에서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사용할 수 없다. 이러한 법원칙이 일반시민들에게는 낯선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실을 발견하여 범죄자를 엄단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자칫 진실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 우리 현대사는 재판절차를 통해 무고한 시민이 자유와 생명을 잃었던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실은 A판사처럼 오심으로 인해 억울한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바로 잡을 기회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국가가 진실발견만을 앞세워 정의를 세우기 위해 위법한 절차를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 법치주의가 지향하는 헌법적 가치는 적법절차의 한도 내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종원 부장판사 (전주지방법원)
November 05, 2020 at 07:07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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